2011년 신묘년(辛卯年)은 매서운 겨울로 시작했다. 입춘을 맞아 봄을 기다렸어야 했을 그해 2월, 한반도 동부에 들이닥친 눈구름이 100년 만의 대폭설을 일으키면서 시민들은 한파를 고스란히 맞아야 했다. 1973년 이래 최저기온을 기록했던 새해의 첫머리를 지나고 보니 봄의 자취는 오간 데 없었고, 7월에는 300mm가 넘는 폭우가 쏟아지면서 우면산을 무너뜨렸다. 제5호 태풍 메아리와 제9호 태풍 무이파가 한반도를 강타했고, 9월에 접어들며 가을을 기다렸던 시민들은 느닷없는 폭염에 맞닥뜨렸다. 사람들은 100년 만의 대폭설에, 봄의 실종에, 300mm가 넘는 물난리에, 두 번의 태풍에, 그리고 가을을 달궜던 열기에 위기를 느꼈다. 

 

전 국민이 우리나라의 이상(異常) 기후를 걱정했던 그해에 우리는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에서 대한민국 고분자 가공 산업의 위기를 이야기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보슬거리던 눈발이 삽시간에 어찌나 거세졌는지 관악산도 그해 폭설을 피해가지는 못했다. 130만여 평의 광활한 교내를 누비던 버스나 자동차가 당최 학교 언덕을 올라올 수 없는 상황에서, 모임을 주최했던 우리는 그저 발을 동동 구를 수밖에 없었다. 

사실 이 모임의 주제는 훨씬 이전, 그러니까 국내 플라스틱 산업이 급격하게 발전하기 시작했던 2000년도 이전부터 화두가 됐던 내용이다. 대학의 연구 과제들이 논문으로 평가받기 시작하면서 발생했던 플라스틱 가공 산업의 구조적인 한계와 그로 인해 필연적으로 도래할 수밖에 없는 위기를 목전에 뒀던 산업계 또는 학계 인사들이 삼삼오오 문제의식을 공유했던 게 이 모임의 시초라 할 수 있다. 누군가는 기업에서, 누군가는 연구소에서, 또 누군가는 학교에서 같은 산업을 바라보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눠온 것이다. 난상공론의 현장에서 부유(浮遊)했던 그때의 대화들은 돌이켜보면 모두 ‘고분자 가공 산업의 위기’라는 한 지점을 가리켰다. 10년도 더 전에 우리는 이미 지금의 고분자 가공 산업이 겪고 있는 문제를, 그 형편을 우려했었다. 

우리나라의 고분자 가공 산업은 2000년대를 전후해 대기업을 중심으로 급격하게 성장했다. 밀레니엄 이전에 미국에서 고분자 가공(Polymer Processing)을 수학(修學)했던 수많은 연구자들이 산업계에 종사하기 시작하면서 빠른 속도로 외연 확대를 견인했다. 

 

이렇게 국내 플라스틱 산업에는 훈풍이 불고 있는데, 정작 산업 기술의 뿌리가 되어야 할 대학에서의 고분자 가공 기술 연구는 한파를 맞았다. 우리나라의 석유화학 및 플라스틱 산업이 전 세계 4위 수준까지 빠른 속도로 성장하는 상황 속에서도 산업 경쟁력의 핵심인 고분자 가공 기술 분야의 연구자 수는 대학에서 지속적으로 줄어들었다. 연구 성과가 논문으로 평가되는 학계의 기조 아래서, 공정 기술 연구로는 학자로서의 생존을 보장받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가공 기술은 기업이 생산성을 확보하고 혁신을 이루기 위해 반드시 갖춰야 할 핵심 무형 자산으로, 적절히 확보하지 못하면 기업의 생존까지 위협받을 수 있는 중요한 요소이다. 또한, 보이지 않는 무형의 기술인 탓에 생산된 제품을 뜯어보거나 고가의 설비를 도입하는 것만으로는 모방할 수 없고 산업의 기술적 난이도가 높아질수록 가공 기술의 중요성은 더 커지기 때문에, 고도의 경쟁력을 확보하려면 우리 스스로 시간과 돈을 투자하여 자체적인 기술력을 확보해야만 한다. 

 

우리는 바로 이 부분에 큰 약점을 지니고 있다. 선진국 기술을 모방하면서 발전했던 초기 산업 단계에서는 문제점이 크게 드러나지 않았지만 산업이 고도화되면서 점차 한계를 드러낸 것이다. 질적 성장을 위한 중요한 시기에, 기업 내의 관련 전문가 수는 오히려 감소했고 이제는 경쟁력 상실을 넘어 최소한의 기술 인력 공급마저 끊겨가는 심각한 위기 상황에 봉착했다. 게다가 더 근본적인 문제는 대학 내에 다음 세대에 지식과 경험을 전달할 수 있는 교수진이 붕괴했다는 점이다. 새로운 세대가 유입되는 토대까지 무너진 것이다. 우리는 논문 중심의 연구 환경이 가공 기술 인력 양성 기능을 '거세'하는 현장을 실시간으로, 적나라하게 목도했다. 

 

우리나라에서 플라스틱 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막대하다. 우리는, 상당한 수준의 기술 경쟁력을 바탕으로 전 세계에 거대한 시장을 보유하고 있는 국내 플라스틱 산업이 영양분 부족으로 뿌리부터 말라가는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고, 더 나아가 기업에 부족한 가공 기술을 공급하고 가공 전문가를 육성할 수 있는 최소한의 토양을 만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왔다. 그리고 그러한 모든 노력의 시작이 2011년 폭설 속 회동이었다. 

 

아직도 그날의 기억이 머릿속에 또렷이 남아 있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열여섯 명의 전문가들이 눈발을 뚫고 지하철 2호선 서울대입구역에서 약 3km, 도보로 1시간 넘게 걸어야 하는 언덕바지 얼음길을 걸어 올라오던 모습이. 매서웠던 추위보다 우리가 품었던 열망이 더 강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열망이 모여 이듬해 고분자나노융합소재가공기술센터(CNSPPT)를 출범시키는 마중물이 되었다. 

 

2022년, 고분자나노융합소재가공기술센터는 설립 10주년을 맞이했다. 그간 우리는 대한민국의 핵심 기간산업인 플라스틱 산업이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그리고 고분자 가공 기술의 명맥을 잇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왔다. 그간 우리가 입을 모아 외쳤던 목소리들이 미약하게나마 우리 산업계에 닿았기를 바라며, 우리 센터의 지난 10년을 엮어낸 이 책자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이야기에 공감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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